천매 2023. 2. 17. 03:14

언제나와 같은 시험기간. 소화기학 중간 시험을 10시간 남짓 남겨두고 있다. 

의대 공부를 할 때 다양한 병의 이름과 특징은 그저 외워야 할 하나의 항목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아무리 정들려 해도 정들기가 어렵다. 공부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길은, 일단 시험에 나왔을 때 답을 추려낼 수 있을만한 특징적인 소견들을 줄줄이 외우는 것뿐. 심지어 웬만한 병들은 풀네임도 모르고, 맨 앞 3글자 정도만 따서 적당히 외우는 경우도 많다. 사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나의 태만이 그저 시간이 짧은 탓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언젠가 크론병이나 궤양성대장염과 같은 염증성장질환(IBD)에 관한 문제를 푼다. 치료법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 막히는 부분이 있어 욕지거리를 하며 괜히 인터넷을 뒤진다. 여러 리서치를 뒤져본다, 하지만 그러면 답은 오히려 더 미궁 속으로 빠진다.

사람마다, 학자마다, 기관마다도 하는 말이 제각각 다르다. 치료법도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족보마다도 하는 말이 다 다르다. 교수님이 바뀔 때마다 추천하는 치료법이 바뀌며, 검색해보면 의사들마다도 골드 스탠다드가 다 다르다. 치료 가이드라인도 매우 복잡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이런 종류의 병을 『난치병』이라고 하는 것이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lists?id=crohn 

 

크론병 궤양성대장염 마이너 갤러리 - 커뮤니티 포털 디시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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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매번 영문으로만 구글 서치엔진에 병명을 검색하다가, 괜히 한국어로 이런 질병들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그때 내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객관적인인 통계 수치나, 적당히 합의하기로 한 일반적인 객관적 리서치나 가이드라인이 아니었다.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병을 실제로 앓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여러 커뮤니티였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였다.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남들 다 건강하게 살고 있을 때 이런 고질병 걸려서 병 활동기때마다 아무것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야 하는 이야기. 치료 끝에 잠시 관해기가 와서 홧김에 먹고싶은 것들 마음대로 먹고 살았다가 다시 병이 심각해져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야기 등이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활동기에만 잠시 그렇다뿐이지 모두들 삶의 루틴에 적응하게 되면 그리고 관해기가 되기만 하면 대체로 버틸만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곤 했다. 

 

시험 족보에는, 그리고 국시 문제집의 증례사례에서는 단순히, 그리고 철저히, 바이탈 사인과 대장 내시경 소견, 그리고 관해기 이후 복약을 임의중단해버린 곤란한 환자로만 묘사된 것이, 실제 세상에서는 어떤 감정을 하고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들도 어딘가에 살아 숨쉬는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은 언제나 묘하다. 그저 활자와 머리속 스키마 속에 머물렀던 상상 속의 사람들이, 실제로 현현하여 자신의 바이탈과 혈액검사성분과 과거력 병력이 아닌,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때 느끼는 감정은, 그저 떫다. 

그저 막연히 떫었다. 

 

 

 

가끔 보면 의학은 한계를 알아가는 학문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때때로 내가 펜을 내려놓게 하고 허무감에 잠기게 한다. 

나는 이따금 시험문제를 맞추기 위해서, 어떤 병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고, 어떤 병이 치료할 수 없는 상태의 병인지 외우게 된다. 그 병이 어떻게 구성된 것인지 알기도 전에 현재까지 기술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대증적으로만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외우는 것은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의미를 다시 생각도록 한다. 

 

물론 한계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확실히 경계지어야,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탐색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의 무지가, 그리고 인류의 집합적인 무지가 낳는 폐단이, 단순히 활자로 기술된 가상의 증례를 담은 시험문제 하나를 더 맞추고 못 맞추고의 차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그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행복과 삶의 질,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삶을 빼앗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한없이 우울해진다. 

이럴 때마다 나는 생각하게 된다. 나는 과연 멀쩡한 임상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나의 지식이 적극적 수행에 미치지 못하고, 그저 기존 가이드라인의 무기력한 순응만을 해야하는 모순감에 압도당할때, 나는 버틸 수 있을 것인지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식하게 기초로 뛰어든다고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리라. 그리고 무엇을 위해 뛰어들어야 하는 지에 대한 보장 또한 없다.

하지만 나는 재구성된 연역이 의학의 진전에 작용하는 힘이 절대적이라 본다. 

나는 임상의학은, 특히 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임상의학은 철저히 귀납의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의료를 수행할 자들에게 있어 이론의 나열보다는 사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의학적 판단은 아무리 논리성을 갖춘다고 하여도 베이즈적으로 내리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 기반에서는 필히 어느정도의 연역이 뒷받침되어야 하리라. 병리의 언어는 생화학의 문자로 기술되고 생리학적 통사로 갖추어져 그 완결된 형태를 드러낸다. 의학도들은 그 미시적 구조들이 구성하는 거대한 거시적인 현상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 거시적인 구조 안에서는 그 현상들의 내부에 어떤 것들이 굴러가고 상호작용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일련의 RCT를 통해 최적화의 길을 걸어나갈 뿐. 그렇다할 패러다임 시프팅은 좀처럼 이루어나가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러한 incremental한 과정은 결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험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복습해야할 내용이 아직 수없이 쌓여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 심정을 이곳에 기술하는 일이, 내일 시험에서 지엽적인 문제 하나 더 맞추고 좋은 학점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탓에 글을 이렇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