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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 되돌아보다/언제나의 일

예고(藝高)

by 천매 2021. 11. 17.

아는 사람이 예전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나더러 애니메이션 《사쿠라장의 애완 그녀》를 보라고 재우쳐 왔었는데

사실 애니는 판타지가 아니면 안보는 편이고 (평범한 일상 세계를 다루는 거라면 차라리 드라마를 보는게 낫다고 본다)
애초에 애니에서 럽코는 가장 싫어하는 장르 중 하나이기 때문에 보지 않고 있었다.

2주 전에 1화를 잠깐 보긴 했는데 내 취향은 전혀 아닌 것 같아 중도하차 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을 계속 하라고 강요를 지나치게 받으면 부정적인 감정이 씌는 법이다.
사람을 설득할 때 가장 유의할 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인데...
되려 반감을 사게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튼 잠깐 애니를 보며 기억에 남았던 점은 예술고등학교의 생활을 다룬다는 점인데
나는 예술고등학교와 매우 접점이 많아서 그런지 잠깐 생각해볼게 많았다




위에 그럴듯한 텍스트 구분선을 해놓았지만, 사실 회상을 한다거나 거창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아버지가 거기에서 일했기 때문에, 어떻게 돌아가는지의 사정은 꽤 잘 알고 있다.



어릴적에는 한두번 학교에 따라갈 일이 있었다.

학교 본관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의 작은 건물에 위치한
학생들이 다 떠난 이후 텅 빈 조소 작업실,

그 안에는 잔잔한 진동음을 내며 찰흙 조형물을 구워내는 가마가 있었고
바닥 곳곳에는 곱게 잘 개어놓은,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 겉이 조금 말라붙은 흙덩이가 큰 세숫대야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내가 가진, 그 학교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억 한 장인데
최근은 그곳에 가지 못한지가 오래되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는 못한다.
그나마 가장 최근의 소식이라면, 내가 대학에 붙었을 때 동료 선생님들이 축하한다며
아버지 몰래, 나와는 하등 상관 없는 그 예고에 대학 합격 축하 플랜카드를 걸었던 일이다.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다.

여튼 그런 일로 우리집은 언제나 흙이 많았다.
지금은 자주 볼 수 없지만 옛날 길거리의 뽑기 기계는, 내용물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찰흙을 넣는 일이 많았다.

위 사진에 보이는 녹색 봉지가 바로 그것이다.

저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 꽝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기계 근처에 버려지는 것이 꽤 많았다.
보통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어린애들은 밟아 터트리거나, 차가 지나다니는 길목 바닥에 설치하여 차가 지나가면 터트리도록 하는 식으로 놀곤 하였지만, 우리 가족은 항상 이것들을 챙겨 집에 들어왔다.
비록 내용물은 굵은 돌이 간혹 섞여있어 잘 골라내야 하기 때문에 빚기에는 까다로운 것이지만, 적당히 아버지가 집에서 아무 형상을 빚어 작상을 떠올리기에는 딱 간편한 용도였다.
흰 종이는 길거리에서 얻을 수 없지만 적당히 고운 흙은 길거리에서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더이상 집에서 흙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아마도 내가 열 네다섯 쯤 되었을 때부터이다.

아버지는 전시회든 공모전이든 하는 것에서 여러번 꺾인 이후, 예술가의 길을 걷는 것을 그만두었다
좁은 세상구석에서 예술로 성공하기에는 인맥이든 뒷돈이든 하는 것이 꼭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자, 미대에서 얼떨결에 얻은 교원 자격을 들고서
근처 아무 예고로 가 교사 일을 하기를 시작하였으니
그이가 애들을 가르친 시간은, 내가 살아온 세월과 딱 같은 시간만큼이다.

나름대로 이루지 못한 여러 꿈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내가 어릴 적 오랜 세월을 발코니에서 흙과 손을 섞고 살아왔겠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욕심은 다 죽은 모양이었고
요새는 학교의 애들에게도 큰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관심있는 것은 주식이든 코인이든 로또든 하는 것이다.

옛적의 꿈같은건 사실 별거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냥 대충 재미있게 놀다가 떠나면 된다는 것을,
그런 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 바로 세상에 치이며 살아가는 어른의 삶의 과정이라



그리고 나는 이번주 안으로 반 학생들이 정리해온 생기부 초안의 내용을 붙이고 다듬어야 하는데, 아마도 조만간의 밤을 새어야 할 것이다.


미대 애들이 아는게 없거니 어쩌거니 하는 것으로 무시를 하는 사람도 있겠는데,
초등학생같은 글을 쓰는 애들도 있어서 가끔은 진짜인 것 같기도 한데내가 보기에는 하나같이 멋지다.
써온 것들을 보면 가식적인 느낌은 없고, 저마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다 하는 것이 느껴진다.

특히 현재 애니나 만화쪽을 전공하고 있으면서, 나중에도 그쪽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애들이 가장 많이 있는 것 같고
(이것 때문에 사쿠라장 애니를 보면서 이 학교 생각이 났다. 만화-애니 전공하는 예고 학생들이 주인공인 모양인데...)
그 외에도 세상의 이런저런 공간들을, 저마다의 시각에서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우고 싶어하는 애들이 있는데
그들의 인생 청사진의 글을 읽다 보면 감동스러울 때가 많다.

글을 읽으면 대충 사람을 알 수 있는데 어지간한 일반고 애들보다 생각이 깊어보이는 애들이 대부분이며
또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또 색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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