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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 즐기다/비문학

유시민 - 나의 한국현대사 中 일부 발췌

by 천매 2021. 10. 24.

발췌라 하긴 뭣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잘라와서 민망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구절들이었다 

현대 한국사와 정치의 큰 흐름을 두 세력으로 나누어 최신의 시사들을 분석하는데, 상당히 통찰력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제2장까지만 읽었는데 계속 읽어봐야겠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내일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의 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즉각 과거로 들어간다. 흐르는 시간에 실려 온 모든 사실은 과거라는 거대한 수용소에서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기다린다. 어떤 역사가의 손길이 닿은 사실만이 그 운명의 집행을 잠시 유예받은 역사적 사실이 된다. 사실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선택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래서 한 시대에 대해 100명의 역사가는 100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으며, 한 시대에 대해 한 사람이 상이한 역사를 쓸 수도 있다.

 

전문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 진학률이 15%도 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대학 졸업장만으로도 급여와 근로조건이 괜찮은 관리직, 전문직, 사무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을 가지 못한 85%에게 허락된 것은 보수가 적고 고되며 위험한 일자리뿐이었다. 그때와 달리 고교 졸업생의 70%가 대학에 가는 지금은 대학졸업장이 괜찮은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말뿐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를 찬양할 자유만 있었고, 비판할 자유는 없었다. 정부의 정책을 추종할 권리는 있었지만 대안을 제시할 권리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다. 고르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대한민국은 풍요롭지만 고르지 않은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산업화 시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구조로 자리잡았다.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중산층이 줄어들었으며, 한번 빈곤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워졌다.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사내하청과 파견 등 비정규직 제도를 합법화한 탓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았으며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심해졌고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자녀에게 이어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커진 가운데 대자본의 중소협력업체 수탈과 계열사 간 부당거래, 대형 유통자본의 골목상권 장악 현상이 횡행한다.

 

인간의 행동은 욕망을 충족하려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만약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에 일정한 우선순위가 있다면 사람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에 위계가 있다고 한 매슬로의 가설은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의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굶어 죽기 직전인 사람에게 존중과 존경, 자아실현과 같은 것은 정신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훌륭한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긴 사람은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귀족과 지식인이었다. 사회적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 천부적 인권, 자유, 평등, 연대와 같은 관념은 산업혁명으로 일찍이 없었던 부를 축적한 서유럽에서 먼저 나타났다. 민주주의는 경제가 발전해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된 곳일수록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철학서를 많이 쓰고 읽는다.

 

국가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복지로 무게중심을 옮겼기 때문이다. 안보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간 것은 인류 문명사의 보편적 계통발생이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우지도 겪지도 못한 상태에서 공화국의 주권자가 됐다. 해방공간의 권력이 미군정이었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나 다름없는 제헌헌법을 채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민주공화국은 사유재산제도와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우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광복 이후 세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배웠다. 4.19를 일으킨 주역이 고등학생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혁명을 한 적이 없었다. 봉건왕정을 지키려고 막아선 왕과 귀족의 목을 자르지도 않았다. 제헌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갖춘 나라들이 지구촌의 주도권을 움켜쥔 20세기 문명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헌법이 현실을 지배하지 못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과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다.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은 1960년 4.19로부터 터져 나왔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5.16으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부는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을 부추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개발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의 지도이념은 반공과 ‘잘살아보세’였고 국가 목표는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이었다.

 

4.19는 자유에 대한 갈망의 단순한 표출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전면적 심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의 욕구를 포착하고 화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 인권, 정의, 존엄, 평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980년 봄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욕망은 1987년 6월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민주화 세력의 집권, 산업화세력의 재집권,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세 번째 정권교체로 이어진 6월 민주항쟁 이후의 정치사는 두 갈래의 욕망의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거듭 확인해줬다.

 

나는 젊었을 때 (...)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수준을 반영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으니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루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공부와 경험이 부족한 청년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토크빌의 말은 민주주의 국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어떤 사회가 독재자의 발밑에 놓여있다면 그 체제는 누구의 수준을 반영하는가 독재자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 모두를 반영한다. 훌륭한 정부를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쟁취할 능력도 국민의 수준에 넣어야 마땅하다.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도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구호는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북 모두 유엔 회원국이 된 후에는 그런 의미마저 사라졌다.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정통성은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통체를 지키려고 헌신할 때 형성된다.

 

외국의 식민지였다가 자주권을 되찾은 신생국가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세울 수 있다. 첫째는 역사의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의 자주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야 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들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 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데만 몰두했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자주 이념이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반면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산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가 공존했던 1980년대 한국사회 한복판에서 탄생한 주사파는 뿌리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의 산물이었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 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재 재건에 총력을 기울려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민생고 해결 공약은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겠지만 병영복귀는 거짓말이었다.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 했기에 순수한 애국심으로 거사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5.16을 4.19 위에 두는 견해가 완전히 터무니없다고 할 수는 없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이었지만 새로운 권력주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를 바꾸지 못했다. 그와 달리 5.16의 주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대폭 늘어난 군대의 힘을 동원했다. 그때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힘에 맞설 만한 집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은 그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국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았기에 ‘구악일소’를 내세운 혁명공약 가운데 가장 쉬운 것부터 실행함으로써 대중이 변화를 체감하게 했다.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군대를 동원해 그런 일을 하면 군사쿠데타라고 한다.

 

4.19와 5.16은 각자 나름의 성공을 거뒀지만 4.19가 정치적으로 승리하는데는 긴 세월이 걸렸다.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4.19의 정신을 받드는 정당이 처음으로 집권했다. 그 승리는 10년으로 막을 내렸지만 2017년 5월 두 번째 집권으로 이어졌다. 5.16의 승리는 화려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통치와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14년 집권으로 끝이 났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33년을 맞았던 2012년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5.16의 부활이 아니라 짧은 커튼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유죄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역사의 법정이 5.16을 단죄했다고 할 수는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전히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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