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소설집 『단어가 내려온다』 중 첫째 글.
참고로 이걸 브금삼아서 봤는데 상당히 느낌있다.
생명이 육체를 떠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육체를 떠난 생명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때는 왜 그렇게 궁금했을까. 몇 날 며칠을 같은 질문에 매달렸다가 어느 밤 알았다. 육체를 떠난 생명은 어디로도 가지 않고 그저 소멸한다는걸. (...) 내가 오로지 나인 상태로 지금과 여기를 버틴 뒤,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뒤로하자. 그것이 우연히 주어진 인생이라는 게임의 주도권을 내게로 찾아오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수영을 하던 중에 갑자기 숨쉬기와 팔 돌리기 박자가 어긋난거예요. 호흡 한 번을 놓치니까 온 몸이 산소를 요구하더군요. (...) 레인 저편에 도착하자 마자 크게 숨을 쉬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몸속의 피 한 방울까지 산소가 도는 것처럼. 그날 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어요. (...) 노을과 간절기와 꽃과 바람을 매 순간 내 몸과 오감으로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도 일종의 예의일 수 있겠다고. (...)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저... 살고 싶었던 거겠죠. (...) 원래 삶의 욕구라는게, 죽겠다는 결심보다는 쉽고 당연해야 하잖아요. (...) 누군가 매일 같은 시간에 권해주기만 해도 살아지는게 하루하루니까.
결국 나는 엄마에게 엄마 자신으로서 생애를 마무리할 기회를 드리지 못했다. (...) 그 미안함과 참담함을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별이의 마지막을 '내가 원했던 방식으로 경험'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것은 이미 내 마음 속에 있었다.
'내가 선택하고 있다'라는 알랑한 자기최면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게 세상엔 너무 많았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실버라이닝에 들어온 결심을 뒤집는다면 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 안에서 내가 아닌 것으로 변해갈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 그러나 나는 이를 권유하지 않았다. 안락사 재고를 권고하라는 메시지를 무시했다. 맑은 마음으로 쌓아올린 결심을 충동적으로 되돌린 인간들이 주어진 시간을 견디며 어떻게 망가지는지 나는 보았다. (...) 고스란히 그 자신으로 남고 싶다는 A17-13의 의지는 살고 싶다는 본능만큼 강렬했다. 인간, 아니 생명의 무한한 능력은 익히 알고 있으므로 A17-13 역시 주어진 시련을 결국은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A17-13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것 같았다. 그는, 그리고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원하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여 마무리할 수 있는 세상에서 ─ 끝을 앞둔 개인은 무엇을 느끼게 되는지를 잘 그려냈다.
세상에 살아가며 모든 일이 자신의 신념대로, 자신이 바라던 대로, 자신이 지향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못한다.
이 때 사람은 아래의 두 갈림길에서 양자택일을 요구받는다.
잃는 것이 있어도,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혹은 ─ 나의 원하는 길이 아니더라도, 일단 世流에 몸을 맡기고 떠밀려 갈 것인가.
전자를 선택하는 것은, 이 글의 주인공이 일관적으로 지향하는 가치 ─
─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을 스스로 가지는 것. 내가 온전히 나인 채로 나의 삶을 마무리짓는 것 ─
을 지키는 과정이다.
물론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에 남겨진 형편이 다르다.
붙잡을게 아직 있고, 즐거울게 아직 많이 남아있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우 生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죽음만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주인공은 치매를 앓는 모친의 허무하게 저물어가는 삶의 불씨를 지켜보며, 그리고 자식의 죽음을, 또 고양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이 완벽한 형태로 마무리짓고자 했다.
어쩌면 그런 경우의 죽음을 향한 선택은, 어쩌면 아름다운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 글에서도 삶의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앞두고 주인공이 자신의 생에 대해 집착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여기서 완벽하게 마무리하려는 죽음의 의지 사이에서의 갈등을 보여준다.
죽음을 완전히 결심했을 때, 그래도 살아보지 않겠느냐는 말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굳게 결심한 사람을 흔들어 살려놓아 삶의 현장으로 되돌려놓았을 때, 그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은 여전히 해결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경우에, 다시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은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을 잃고 완전히 망가지는 과정이다.
비록 안드로이드라도 그런 점을 숙고하여, 죽음의 결심을 흐트러놓지 않으려는 조이의 배려 또한 매우 재미있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라 삶을 마치기를 결정하는 최후의 모습도 굉장히 여운에 남았다.
적극적 안락사의 허용은, 언젠가는 꽤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문제일 것 같다.
이미 실시하고 있는 안락사(자율적 조력자살) 프로그램이 일부 국가에는 있는 모양이긴 하다.
자신의 삶이 선택 없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 마지막도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비참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신념을 망가뜨려가면서, 자신의 수많은 생의 압력과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지켜나가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생겨날 생명 경시 풍조를 감안해서 이와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금지해야 할지, 혹은 개개인에게 주는 삶의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옳을 것일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것 같다.
어쩌면, 더이상 세상에 미련 없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때에 죽음으로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살이 완전히 자리잡았을 때의 이야기이지, 지금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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